전세복 편집국장

여야 합의로 마련된 일감 몰아주기 법이 시행도 하기 전에 사문화될 위기를 맞고 있다.경제민주화 요구는 무엇보다 재벌의 일감 몰아주기라는 잘못된 관행에서 촉발됐다. 총수 일가가 출자한 자회사에 일감을 몰아줘 소유주들은 땅 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재산을 불려왔다.

이로 인해 소액주주들은 피해를 입고 불공정 경쟁에 내몰린 중소·중견기업들은 설 자리를 잃어갔다. 일감 몰아주기를 규제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지난 6월 국회를 통과한 것도 이것만큼은 근절돼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활성화 발언이 나온 뒤 노골화되고 있는 경제민주화 백지화 움직임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민주화 핵심 법안이 누더기로 변하는 일은 어떤 형태로든 막아야 한다.

시행령 마련 과정에 새누리당이 규제 범위를 정부안보다 대폭 축소할 조짐을 보이고 있어서다. 가뜩이나 정부가 마련한 규제 범위도 당초 예상보다 줄어든 터다. 여기에 노대래 공정위원장은 대기업 전산 관련 계열사(시스템통합 업체)는 대상에서 제외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차 떼고 포 떼면 사실상 빈 껍데기만 남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을 상장사의 경우 총수 일가 지분 30% 이상, 비상장사는 20% 이상으로 설정해 입법예고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새누리당 정무위 소속 일부 의원들이 지분 50% 이상 계열사로 한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 뒤에는 재벌 총수 일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집요한 로비가 있다. 법 개정안은 통과됐지만 지분율은 시행령에 담아야 한다.

총수 지분을 50%로 높이면 대상 기업은 100여개로 확 줄어들고, 일감 몰아주기 대표 기업인 현대글로비스나 삼성에버랜드, 에스케이씨앤씨 등은 쏙 빠진다고 한다. 있으나 마나 한 법이 되는 셈이다. 공정위 지분율 기준으로도 삼성그룹에서 내부거래 비중이 70%가 넘는 삼성에스디에스가 총수 일가 지분이 17%대에 그쳐 대상에서 빠지는 판국이다.

경제살리기를 틈탄 경제민주화 입법 후퇴 조짐은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9월 정기국회에는 일감 몰아주기뿐 아니라 신규 순환출자 금지와 같은 핵심 법안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정부·여당은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경제민주화는 시대적 요청이자 박 대통령의 대선공약이다. 대기업의 불공정 거래행위를 바로잡지 않으면 중소·중견기업이 발 붙일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대기업이 우물 안 경쟁을 피해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물꼬를 터 주기 위해서라도 잘못된 관행은 바로잡아야 한다. 일감 몰아주기 규제 법은 첫 시험대일 뿐이다.

결국 정상적인 계열사간 거래를 막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인데, 이미 ‘원칙 불허, 예외 허용’에서 ‘원칙 허용, 예외 불허’로 규정이 완화된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경제민주화 핵심 법안이 누더기로 변하는 일은 어떤 형태로든 막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