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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대도 패한 도솔산 전투, 해병 1연대가 인계 받아 20일 만에 승리
양구에서 피는 꽃은 피보다 붉어
기사입력 2016-06-13 오후 8:57:00 | 최종수정 2016-06-13 오후 8:57:39   



  김명용 논설실장

 하늘의 우렛소리 땅 위에 아우성 불바다 / 피투성이로 새우기 몇 밤/ 이 나라 해병들이 명예 걸메고 / 목숨 내건 싸움터 도솔산일세. (후렴) 오! 오! 도솔산 높은 봉 해병대 쌓아 올린 승리의 산 /오늘도 젊은 피 불길을 뿜는다 /. ‘도솔산의 노래’의 3절중 1절이다. 이 노래 가사를 읽으면 당시 도솔산 전투가 얼마나 치열 했는지를 급방 느낄 수 있다.

필자는 오는 17일 ~18일 양일간 강원 양구에서 열리는 도솔산 지구 전투 전승제 행사에 앞서 65년전 양구 도솔산에서 벌어진 도솔산 전투 현장을 찾아 당시  상황을 자세히 취재 했다. 도솔산지구 전투는 우리 해병 1연대와 인민군, 중공군과의 20일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로 해병대 5대 전투의 하나로 꼽힌다.  막강한 미 해병 5연대도 큰 피해를 입고 물러선 이 전투를 우리 해병1연대가 인계 받아 승리해 그 의미는 남다르다.

시인 장승진은 이 전투를 ‘양구땅에 피는 꽃은 피보다 더 붉어’라고 읊어 이 전투가 얼마나 치열 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이 기사는 지난 1일자 발행된 무적해병신문에 전재됐다

필자는 지난달 말쯤 양구군 홍보팀 김영일 팀장(36)의 안내를 받아 도솔산 현장을 찾았다. 하지만 65년이 지난 지금도 현장 접근은 통제돼 있었다. 곳곳에 지레가 묻혀 있어 접근 할수 없었다.  도솔산 중턱에 양구군이 세운 도솔산 위령비가  당시의 전투 분위기를 조금 느끼게 했다. 위령비 왼쪽으로는 우리 해병대의 작전 루트와 날자가 상세히 표시돼 있었고 위령비 후면 동판에는 우리 해병대와 미 해병대의 전사자 명단이 빼곡이 새겨져 있었다. 우리 해병대 전사자는 214명, 미 해병대는 623명이었다.

이를 보는 순간 가슴이 먹먹 해 졌다. 특히 미 해병의 많은 전사자에 고개가 숙여 졌다. 또 위령비 정면 오른쪽으로 탱크가 상징적으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고 양구군 5개면이 만들어 세운 충령비 장승이 쭉 늘어져 있었다.

위령비로 올라가는 두 갈래길 못 미쳐 도로 아래에는 당시 우리 해병1연대 지휘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 D 육군 부대가 자리 하고 있었다.

우리 해병대 창설은 1년여의 초짜

우리 해병1연대가 도솔산지구 전투에 투입된 것은 미 해병 1사단 5연대와 임무 교대 하면서 부터다. 당시 미 5연대는 도솔산 전투에서 500여명이 사상 당하자 미 해병 1사단 소속이던 우리 해병1연대가 그 전투 임무를 고스란히 인계 받았다. 당시 미 제5연대는 세계 최강의 해병 부대로 소문나 있던 부대 였다.

이에 비해 우리 해병1연대는 창설 된지 겨우 1년여 밖에 안 되는 초짜 였다. 그래서 산악 전투에 필수적인 독도법도 제대로 익히지 못 했고 인식표도 이해 못 했다. 철수 명령으로 하산하던 미 5연대 해병들은 우리 해병 대원에 산악 전투 경험도 없이 어떻게 전투 하려느냐며 크게 걱정했다.

우리 해병 1연대장은 김대식 대령이었고 1대대장은 공정식 소령(6대 해병대 사령관 .중장), 2대대장은 윤영준 소령, 3대대장은 김윤근 소령(예비역 중장)이었다. 도솔산 전투는 6월1일부터 개시됐다.

우리 해병대가 맞서야 할 인민군 중공군은 1만명이 넘는 사단급

당시 해병 1연대 병력은 4500명에 불과 했으나 상대  인민군과 중공군은 1만여명이 넘는 사단급 이었다. 우리 해병대 1대대는 도솔산 왼쪽에서, 2대대는 중앙에서, 3대대는 우측에서 공격에 나섰다. 해병1연대가 맡은 공격 지점은 도솔산을 포함해 모두 24개 봉우리였다. 캔사스선(임진강 하구-연천-화천-양구-원통-간성)안의 16개 목표와 배지선(Bager Line ,돌산령,도솔산 ,팔량리, 소룡포, 대령포)선상의 8개 지점이었다.

이곳에는 인민군 최 정예부대로 꼽히는 제 5군단 산하의 12사단과 32사단이 배치돼 있었다. 공격에 들어간 공정식(孔正植) 1대대장은 자신의 좌우명인 임전무퇴를 부대원들에 강조하면서 맡은 목표를 빨리 점령 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이서근 (李西根)중대장이 이끄는 1중대는 대대 왼쪽에서 제1목표를 향해 공격해 들어 갔다. 2대대(대대장 尹永俊 소령)와 3대대 (대대장 金潤根) 각 중대들도 각기 맡은 지역을 공격했다.

1대대 1중대는 전진 중에 적의 공격을 받고 잠시 움츠러 들었으나 곧 전열을 정비해 적의 박격포 공격에 105mm 곡사포로 대응 하면서 진격 했다. 1중대의 포격으로  제1목표가 박살났다.

공격 여의치 않자 소대별로 공격

그러자 적의 저항은 더욱 거셌다. 1중대는 공격 지점의 경사도가 심하고 곳곳에 지뢰와 부비트랩이 설치돼 전진이 어려웠다. 그래서 공격방법을 소대별로 바꾸어 육탄전을 병행하며 공격했다. 기관총 사격과 105mm곡사포 지원을 받으며 이런 방법으로 제1목표를 쉽게 점령했다.

이 전투로 인원 피해를 다수 입었으나 여세를 몰아 제2목표 공격도 늦추지 않았다. 짙은 안개와 비로 인해 전진이 어려웠지만 한걸음 한걸음 나아 갔다.  이때 불의의 적의 공격을 받아 5명이 전사하고 12명이 부상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제2목표 점령은 일단 실패 했다.

공정식 대대장은 1중대에 재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적의 저항이 강해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자 공정식 대대장은 공격 임무를 임병윤 제3 중대장(중위)에게 넘기고  제2목표와 제4목표를 공격토록 했다.

포복으로 적진지 공격키로

제2, 4목표는 인민군 12사단장의 진지 사수 명령이 내려져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곳은 철벽이나 다름 없었다. 임병윤 중대장은 기존의 전투방식으로는 점령이 어렵다고 보고 포복으로 고지를 점령 키로 했다. 공격에 나선 임 중대장은 제2목표 중간 지점을 장악한 뒤 정상까지 야간 포복으로 기어 올라 갔다.

적은 올라오는 임 중대장에 기관총 사격과 방망이 수류탄을 투척하며 저지 했다. 하지만 임 중대장은 몸을 숨겨 가며 2목표까지 올라 갔다. 임 중대장은 김동운 3소대장의 특공조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2목표를 점령했다. 임 중대장은 공격중 심한 부상으로 미군 병원선에서 치료 받다 숨졌다.

도솔산을 점령하지 못하면 그 북방에 있는 피의 능선(해발 1211m)과 단장의 능선(해발894m), 가칠봉(해발 1242m) 김일성고지, 모택동고지등도 점령이 불가능했다. 전체 점령 24개 목표중 적의 저항이 가장 완강 한곳은 제4 제9 제12목표 였다.

 공격 여의치 않자 야간 공격으로 전환

 김일성은 이 지점들을 난공 불락이라고 호언 장담 했다. 모두 절벽에 위치해 공격이 어려웠다.  적은 고지 위에 중기관총을 배치하고 충분한 양의 수류탄을 투척하며 해병대의 공격을 막았다.

제 4목표 제 9목표 제12목표를 점령 못하자 미 해병 1사단장 토마스 소장은 고문관을 보내 김대식 연대장에게 빨리 점령하도록 독촉했다. 공정식 대대장은 즉각 이응덕(李應德) 2중대장(중위)에게 제 4목표를 공격토록 명령 했다. 공격에 나선 2중대는 적의 공격을 받고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해야 했다. 부대를 재 편성 해야 했으나 절대 병력이 부족해 불가능했다.

이근식 소위 수류탄 들고 홀로 적진 파괴에 나서 성공

이때 3소대장 이근식(李根植) 소위는 자진해 “내가 적진지를 분쇄 하겠다”며 홀로 나섰다. 이 소대장은 2소대장의 만류도 뿌리치고 수류탄 4발을 차고 포복으로 적 진지를 향해 기어 올라 갔다.

부하 소대원들에게는 ‘산위에서 무엇이든 움직이면 엄호 사격을 지시한뒤 움직였다. 정상에 다달을 즈음 적에 노출된 이 소대장은 그들의 공격을 받을 뻔 했으나 우리 소대원들의 선제 공격으로 위기를 넘겼다.

적진지 가까이에서 이 소대장은 진지에서 웅성 대는 소리를 들었다. 수류탄을 양손에 든 이 소위는 손에 땀이 났다. 이윽고 핀을 빼고 수류탄을 적 진지 안으로 밀어 넣었다. 순간 꽝 소리와 함께 진지는 박살 나고 적들은 다이빙 하듯 곤두 박질 치며 떨어져 죽었다. 이후 이 소대장은 수류탄 돌격 소대장이란 별명이 붙었다.

나머지 목표 공격을 위해 우리 해병부대는 주간공격에서  야간공격으로 바꾸었다. 1대대 2중대는 이 바꾼 야간 공격으로 김일성이 호언하던 4목표를 온갖 어려움 끝에 마침내 점령했다. 이어 2대대는 9목표를 3대대는 12목표를  점령했다.

이들 목표를 점령하기 까지 우리 해병대원들은 많은 피해를 입어야 했다. 그래도 해병대원들은 기 죽지 않고 필승을 다짐하며 전의를 불태웠다.

위령제 지내 숨져간 전우들의 혼 달래

이에 각 중대장들은 숨져간 전우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위령제를 지냈다. 주변의 큰 나무를 대검으로 잘라 다듬어 위령비를 세우고 조화는 지천에 널려 있는 야생초로 대신 했다. 위령비에 새긴 충령비(忠靈碑)란 글씨는 안동 출신 김동환 소위가 썼다. 그런뒤 숙연한 가운데 위령제를 지냈다.
위령제에는 김대식 연대장과 각 대대장 중대장등이 참석했다. 식순에 따라 조총이 발사되고 2대대 7중대장 박정모 중위의 추도사가 낭독되자 위령제 행사장은 눈물 바다로 변했다. 김대식 연대장도 각 대대장들도 눈물을 흘렸다.

한편 김대식 연대장은 도솔산 중앙에서 공격하던 2대대가 큰 피해를 입자 예비대였던 3대대(대대장 金潤根 소령)를 공격 부대로 전환 했다. 이로써 해병대 1연대는 예비대가 없는 부대가 됐다. 3대대의 공격 지점은  제6, 제12, 제13 목표 점령이었다. 김윤근 대대장은 즉각 예하 10중대에 명령해 이들 목표를 공격  토록 했다. 하지만 적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번번이 실패 했다.

강복구 9중대장 아픔 견디며 공격 고삐 늦추지 않아

10중대는 미 해병대 포병의 네이팜탄 투하와 기총소사의 지원을 받았으나 막대한 피해를 입고 11중대와 교대 해야 했다.  11중대도 지형 험악으로 인해 공격이 여의치 않았다. 오히려 적들이 공세를 취하고 나와 당황해야 했다. 적들은 유리한 고지에서 수류탄을 퍼부어 아군의 전진을 막았다.

11중대장 박건섭(朴建燮)대위는 전진하다 적이 설치한 부비트랩 폭발로 큰 부상을 입고도 진두 지휘 하며 적진을 향해 돌진 했다. 그렇지만 적의 방어선을 뚫기에는 역 부족 이었다. 결국 30여명의 인명 피해를 입고 공격 임무를 강복구(姜福求) 중위가 지휘하는 9중대에 넘겨야 했다. 9중대는 미 해병대 포병의 155mm곡사포 지원을 받으며 전진 했다.

강 중대장은 이때 곡사포 포격으로  부서진 돌 조각에 등을 맞아 상처를 입었으나 아픔을 견디며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9중대의 공격에 적들은 겁을 먹고 물러 섰다. 이때라 판단한 강 중위는 돌격 명령을 내리고 부하병들과 함께 적진지에 뛰어 들었다.

김일성이 난공불락이라 호언하던 적 진지 차례로 점령

미 해병 전투기들도 네이팜탄등을 투척하며 9중대의 공격을 도왔다. 9중대는 드디어 왼쪽에서 공격하던 11중대와 함께 김일성이 난공불락이라던 제13목표를 점령 했다. 이 진지 안에서는 적 시체 120여구가 발견됐다.

그후로는 적의 공격이 미미 했다. 야음을 타 공격한 뒤 날이 밝으면 도망 쳤다. 3대대는 여세를 몰아 제12목표를 점령하고 이어 14, 15목표도 점령 했다. 이로써 해병대 1연대는 작전 20여일만에 캔사스선안의 16개 목표를 모두 점령하고 배저선상의 제17,18,19등 8개목표도 점령했다.

이승만 대통령, 전투 끝나자 해병대 부대에 ‘무적해병’ 휘호 하사

해병 1연대가 4500명의 병력으로 사단급인 인민군과 중공군을 격퇴하고 승리한데 고무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해병 1연대를 직접 방문해 해병대 장병들의 노고를 치하 하고 현장에서 ‘무적해병’이라는 친필 휘호를 써 하사 했다. ‘무적해병’ 은 오늘날 ‘귀신 잡는 해병’과 함께 해병대의 대명사 처럼  됐다.

미국 대통령도 도솔산지구 전투에 공이 큰 참모장 김성은 대령과 연대장 김대식 대령에게 은성무공훈장을 각각 수여 하고 1대대장 공정식 소령과 2대대장 윤영준 소령, 3대대장 김윤근 소령, 통신대장 이판개 대위에게는 동성무공훈장을 수여 했다. 제4목표를 수류탄으로 파괴한 이근식 소위에게는 은성무공 훈장을 수여 했다.

해병대 불굴의 감투 정신으로 무적 해병 신화 창조

도솔산 지역은 아군이 확보 하지 못하면 북상중에 있던 국군과 유엔군의 지상 부대는 한 걸음도 진출하지 못할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포위당할 위험도 있었다. 그만큼 이 지역은 전략상 매우 중요했다.

해병1연대는 무적 해병의 투혼으로  북한의 정예부대 격퇴하고 승리하는 명실 상부한 해병의 신화를 창조했다. 이 전투는 1951년 6월초 시작해 20일만인 24일 종료 됐다. 하지만 아직도 북한과 대치 하고 있는 이상 이 전투가 완전히 끝났다고는 볼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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