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옛날에는 산넘어 마을이 있어도 모르고 살 수 있었고 강 건너 마을이 있어도 건너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때는 자연이 주는 대로 먹고 자연이 허락하는 대로 살아야 했던 까닭입니다. 그래서 시장은커녕 장터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서서히 사고파는 버릇을 갖게 되면서 장터가 생겼습니다. 한 나라 안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것은 개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내 돈이 남의 호주머니로 들어가는 꼴이지만 나라의 입장에서 본다면 호주머니 돈이나 쌈짓돈이나 마찬가지가 되어 물건이 흐르고 돈이 흘러 다닐 뿐 제 나라 밖으로 나가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라와 나라가 서로 장사를 하면서부터 사정은 아주 달라 지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지구라는 것이 천하였지만 지금은 하나의 고을처럼 좁아졌습니다.

하나의 마을에도 부자(富者)가 있고 빈자(貧者)가 있는 것처럼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도 매양 같습니다. 부유한 나라는 가난한 나라에게 빚을 놓고, 빚을 걸머진 나라는 원금만 갚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자까지 붙여서 갚아야 하는 것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부채 관계나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빚지고 사는 사람은 허리 펼 날이 없는 것처럼 빚진 나라 역시 항상 국제사회에서 수모(受侮)를 당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구한말(舊韓末) 때 이러한 수모(受侮)를 뼈저리게 당했습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청나라 것이라면 무턱대고 좋은 것이란 풍조가 구한말에는 만연되어 못된 것은 조선 것이고 좋은 것은 외국 것이란 생각이 박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일본한테 나라를 팔아먹고 마는 천추(千秋)의 망신을 당하고야 말았습니다. 나라를 송두리째 넘긴다는 외교문서에 마지막 도장을 찍었던 국치일(國恥日)에야 조선에 망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에 경제적으로 거덜 난 집처럼 되고 말았던 셈입니다.

들기름이나 명아주 기름이 아니면 관솔불로 밤을 밝힐 때 일본 상인의 석유가 들어와 조선 사람의 돈을 긁어 갔습니다. 석유로 호롱불을 밝히자 일본 상인은 남포를 들고 와서 조선 사람의 돈을 후려 갔습니다. 부싯돌이나 유황개피로 불을 지피던 조선 사람에게 성냥을 일본 상인은 들고 와서 조선 사람의 호주머니를 털어 갔습니다. 석유와 성냥, 그리고 남포등을 조선 사람의 순동(純銅)의 엽전을 주고 샀었고 긁어모은 수동엽전을 일본 상인은 녹인 다음 그 속에다 값싼 다른 금속을 섞어 십 배의 백동(白銅)엽전을 만들어 다시 그 가짜 엽전으로 조선의 쌀과 금을 일본으로 후려 갔습니다.

조선 사람은 진짜 엽전을 주고 비싼 값에 일본 상인의 석유, 성냥, 그리고 남포 따위를 사서 썼고, 일본 상인은 조선의 화폐인 엽전을 녹여 10배 이상의 가짜 엽전을 만들어 그 가짜 엽전으로 조선의 물건을 빼앗아 갔으니 앉아서 도둑질을 안팎으로 당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나 분통이 터질 것이고 미덥지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이것은 백 년 전에 사실로 있었던 어처구니 없는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일본 상인을 도둑놈이라고 핏대를 올려 보앗자 소용이 없으나 내 나라 돈이 남의 나라 수중으로 들어가면 꼼짝 못하고 온 백성이 빚쟁이로 나앉고 마는 것입니다.

속 알맹이를 다 빼앗긴 다음에야 당한 것을 알고서는 물산장려운동이니 국산품애용운동이니 민족자본 형성이니 뒷장구를 치는 것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일제의 탄압 밑에서 완전히 소비 시장으로 전락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제 나라의 물건을 업신여기고 남의 나라 물건을 좋아하다보면 나라도 파산선고를 당하고 세계무대의 거리에서 알거지가 되고 마는 법입니다. 조선시대에 그랫지 지금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하지 마라고할 것입니다 . 거지되는 데 따로 없고 어제 오늘이 없습니다